드미트리 파페르노(피아노)

파페르노의 구소련 멜로디야 레이블 마지막 녹음
1955년 제5회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입상 후 시작된 파페르노의 음반 녹음은 1975년에 마침표를 찍는다. 1975년 겨울 파페르노는 그리그와 리스트를 선곡해 그의 모스크바의 연주 인생을 마감했다. 멜로디야 자료실에 보관된 오리지널 음원이 리마스터링을 통해 45년이 훌쩍 지나 CD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그의 ’발라드‘는 주제와 변주의 다채로운 빛깔이 팔레트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북구의 어두움은 조국을 떠나기로 한 거장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시종일관 회색빛 그림자를 드리운다.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는 광기에 찬 연주자의 예술혼을 태운다. 1967년 멜로디야에서 출시된 LP와 같은 음원인 쇼팽 소나타 2번. 3악장 ’장송 행진곡‘은 눈물마저 마른다. 이토록 투명하게 아픈 쇼팽을 들어보지 못했다. 음질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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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파페르노(Dmitry Paperno 1929~2020)

20세기 세계 피아노계를 주름잡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그 양대 산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이다. 모스크바 피아노 스쿨은 공산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별처럼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시켰다. 콘스탄틴 이굼노프(1873~1948), 알렉산더 골덴바이저(1875~1961), 겐리히 네이가우스(1888~1964), 사무엘 파인베르그(1890~1962). 이 위대한 이름들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4개 피아노 학파를 이끌던 거장들이다. 이들은 각기 독특한 교습 방식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고 전 세계에 러시아 피아니즘을 전파하게 된다. 그 가운데 골덴바이저는 우리에게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리 긴즈부르그, 라자르 베르만, 옥사나 야블론스카야, 드미트리 바쉬키로프 등 ‘골덴바이저 키즈’ 들은 하나같이 육중한 거목이다.

드미트리 파페르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니콜라예바와 한솥밥을 먹으며 골덴바이저를 사사했던,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피아니스트’다. 1955년 제5회 쇼팽 콩쿠르에서 6위에 입상하며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때 룸메이트였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2위에 입상한다. 3년 뒤 1958년 제1회 에네스쿠 콩쿠르에서는 2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파페르노는 동구권과 쿠바 등 공산권 국가 뿐 아니라 영국, 벨기에 등 서유럽에서도 콘서트 투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에밀 길렐스 등 극히 일부 연주자를 제외하고 서방 국가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구소련 피아니스트는 많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17년 동안 파페르노의 국외 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67년부터 파페르노는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그의 초창기 녹음이 세상에 나오기도 했다.

파페르노는 1929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0대의 파페르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독일군에게 살해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반유대주의에 대해 몸서리치는 거부감을 표출했다. 1948년 2월 당국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지 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미아스코프스키, 하차투리안을 공격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음악은 형식주의적이고 인민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일컬어지며 사실상 금지되었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정진하던 파페르노에게 이런 상황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1952년 스탈린 치하에서 유태인 작가와 시인 몇몇이 비밀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1968년 8월 ‘프라하의 봄’이 무력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파페르노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예술가의 내적인 상처는 내성적인 성격을 고착화시켰고 어두운 세계관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파페르노는 1975년 출국 비자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는 즉시 당에 의해 반역자가 되었고 삶과 죽음은 넘나드는 박해를 받게 된다. 파페르노는 극적으로 1976년 3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를 떠났고 이듬해 1월 시카고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즐기지 못하고 마음은 늘 러시아에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미국 망명 시절 그토록 조국을 잊지 못해 더 이상 걸작을 쓰지 못했던 것처럼 파페르노 또한 예전처럼 활발한 연주를 하지 못했다. 시카고 드폴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전수하는데 집중했다. 제자를 5명 이하로만 가르친다는 에피소드는 파페르노의 완벽주의를 잘 보여준다. 파페르노는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피아니스트의 노트(Notes of a Moscow Pianist)’와 ‘포스트스크립툼’의 저자로 자신의 세계관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1989년 시카고 고전음악 음반 재단(Chicago Classical Recording Foundation)에서 설립한 음반사 세이디(Cedille Records)는 파페르노에게 세이디 레이블의 첫 음반 출시를 제안했다. 그 결과물은 ‘Dmitry Paperno Plays Russian Piano Music’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파페르노의 소중한 음원을 발굴한 세이디 레이블은 보석과도 같은 음반을 연이어 발표했다. 골덴바이저의 뒤를 잇는 정통 모스크바 피아노 스쿨의 적자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수를 보여주면서도, 굴곡진 그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광기와 상반되는 부드러운 빛은 파페르노 음악의 양면을 반추하는 명반들이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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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ITRY PAPERNO - RECORDINGS BY A MOSCOW PIANIST [브람스, 쇼팽, 리스트, 그리그: 멜로디야 레이블 녹음 - 드미트리 파페르노]